
흥선대원군의 쇄국정책, 과연 실패한 근대화의 상징일 뿐인가?
― 제국주의 침략기, ‘자주 수호’의 마지막 몸부림으로 다시 보기
🏯 “서양 오랑캐가 침범하는데 싸우지 않으면 화친하는 것이요, 화친을 주장하는 것은 나라를 파는 것이다.”
전국 각지에 세워졌던 척화비(斥和碑)의 이 서슬 퍼런 문구는, 흥선대원군을 상징하는 이미지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교과서에서 그를 종종 ‘근대화를 거부한 완고한 지도자’, 혹은 쇄국정책으로 조선을 고립시킨 인물로 배워왔습니다. 그의 이름에는 늘 ‘시대의 흐름을 읽지 못한 독재자’라는 그림자가 따라붙습니다.
하지만 질문을 던져봅시다. 그는 정말로 시대의 흐름을 몰랐던 무능한 지도자였을까요? 아니면, 포탄을 앞세워 통상을 요구하는 제국주의의 거센 파도 앞에서, 조선의 ‘자주’를 지켜내려 했던 고독한 결단자였을까요? 이번 포스팅에서는 '쇄국'이라는 단어의 굴레를 벗겨내고, 19세기 격랑 속 흥선대원군의 선택을 입체적으로 재해석해보고자 합니다.
[흥선대원군의 결의를 상징하는 척화비(斥和碑)]

🌊 포식자들의 시대, 칼날 위에 선 조선
19세기 중엽, 조선을 둘러싼 국제정세는 한마디로 '약육강식'의 시대였습니다. 서구 열강은 아시아를 새로운 시장이자 원료 공급지로 보고 무차별적인 팽창을 거듭하고 있었습니다.
동아시아를 뒤덮은 제국주의의 그림자
- 청나라의 몰락: 아편전쟁(1840)의 패배로 '아시아의 거인' 청나라는 서양 열강에 문호를 개방하고 홍콩을 할양하는 등 반식민지 상태로 전락하고 있었습니다. 조선이 믿던 가장 큰 울타리가 무너지고 있던 것입니다.
- 일본의 부상: 메이지유신(1868)으로 근대화에 성공한 일본은 제국주의 대열에 합류하여, 가장 먼저 조선을 향해 팽창의 야욕을 드러내기 시작했습니다.
- 서구 열강의 접근: 프랑스, 미국, 영국, 러시아 등은 통상을 요구하며 조선의 해안에 끊임없이 이양선(異樣船)을 출몰시키며 무력 시위의 명분을 쌓고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조선이 아무런 대비 없이 '개방'을 선택했다면, 그 결과는 아편에 중독되고 영토를 잃은 청나라의 길과 크게 다르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아편전쟁 당시 상황을 묘사한 그림]

🛡 '쇄국'이 아닌 '쇄방(鎖邦)': 대원군의 내부 개혁과 국가 방어 전략
흥선대원군은 단순히 문을 걸어 잠그는 데만 집중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정책은 '내부의 힘을 키워 외부의 위협에 맞선다'는 명확한 목표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는 '쇄국'보다는 '나라의 방비를 굳건히 한다'는 의미의 '쇄방(鎖邦)'으로 이해하는 것이 더 정확합니다.
안으로는 왕권 강화와 민생 안정
- 서원 철폐: 붕당의 근거지이자 면세 특권을 누리던 전국의 서원을 47개소만 남기고 철폐했습니다. 이는 지방 사림 세력을 약화시키고 국가 재정을 확충하는 과감한 개혁이었습니다.
- 호포제 실시: 신분에 관계없이 모든 가호에 군포를 부과하여, 양반들의 특권을 없애고 조세 형평성을 높였습니다.
- 경복궁 중건: 임진왜란 이후 폐허로 남아있던 경복궁을 다시 지어, 추락했던 왕실의 권위를 회복하고 국가의 중심을 바로 세우고자 했습니다.
[대원군의 왕권 강화 의지를 상징하는 경복궁 근정전]

밖으로는 통상수교 거부
이러한 내부 개혁을 안정적으로 추진하기 위해, 그는 외세의 개입을 차단하는 것이 최우선 과제라고 판단했습니다. 그의 통상수교 거부 정책은, 단순히 외부 문명을 배척한 것이 아니라, 아직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불평등한 관계를 맺지 않겠다는 '자주권 방어' 전략이었습니다.
⚔ 두 차례의 양요(洋擾): 포화 속에서 확인한 저항의 의지
대원군의 우려는 곧 현실이 되었습니다. 프랑스와 미국은 천주교 박해와 제너럴 셔먼호 사건을 빌미로 강화도를 침략합니다.
📌 병인양요 (1866): 프랑스 함대를 물리치다
천주교 탄압을 구실로 침략한 프랑스군은 강화도를 점령하고 외규장각 도서를 약탈하는 만행을 저질렀습니다. 하지만 양헌수 장군이 이끈 조선군은 정족산성에서, 한성근이 이끈 부대는 문수산성에서 결사적으로 항전하여 프랑스군에게 큰 피해를 입혔고, 결국 프랑스 함대는 별다른 소득 없이 물러났습니다.
[병인양요 당시 약탈당한 외규장각 의궤]

📌 신미양요 (1871): 미군에게 쓰라린 상처를 남기다
제너럴 셔먼호 사건을 빌미로 통상을 요구하며 침략한 미군은 압도적인 화력을 앞세워 강화도 초지진과 덕진진을 함락시켰습니다. 하지만 광성보에 이르러 어재연 장군과 수비군들은 백병전까지 벌이며 마지막 한 사람까지 장렬히 저항했습니다. 비록 광성보는 함락되었지만, 조선군의 격렬한 저항에 놀란 미군은 더 이상 북상을 포기하고 철수했습니다. 이때 미군에게 빼앗긴 '수자기(帥字旗)'는 136년 만인 2007년에야 한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신미양요 당시 미군에게 빼앗겼던 어재연 장군의 수자기(帥字旗)]

두 차례의 양요는 조선이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님을 보여준 사건이자, 대원군이 척화비를 세우며 통상 거부 의지를 더욱 확고히 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 나의 생각: '문을 걸어 잠근 자'가 아니라, '성벽을 지키려 한 자'
우리는 종종 ‘개방=선(善), 쇄국=악(惡)’이라는 이분법에 사로잡혀 역사를 평가합니다. 하지만 당시 조선에게 '개방'은 '기회'가 아니라 '위협'이었습니다. 그런 맥락에서 흥선대원군의 정책은 시대를 역행한 퇴보가 아니라, 제국주의라는 절벽 앞에서 나라의 주권을 지키기 위한 고독하고 현실적인 전략이었다고 재평가하고 싶습니다.
물론, 그의 정책이 결과적으로 조선의 근대화를 늦추었다는 비판은 타당합니다. 내부 개혁 역시 왕권 강화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고, 아래로부터의 변화를 이끌어내지는 못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간과하지 말아야 할 점은, 그가 집권했던 10년간 조선은 열강과 단 하나의 불평등 조약도 맺지 않았고, 온전한 독립국의 지위를 유지했다는 사실입니다. 그가 실각한 직후, 조선은 강화도 조약(1876)을 시작으로 빠르게 국권을 상실해갔습니다.
제가 보기에 그는 '문을 걸어 잠근 자'가 아니라, '무너지는 성벽을 온몸으로 지탱하려 한 마지막 수비대장'에 가깝습니다. 그의 정책을 다시 해석하는 일은, 오늘날 우리가 '자주'와 '개방', '보존'과 '혁신' 사이에서 어떤 균형을 택할 것인가에 대한 깊은 성찰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초상]

📘 참고문헌 및 추천자료
- 이태진, 『고종시대의 재조명』
- 김용덕, 『조선말 쇄국정책 재평가』
- 한국근현대사학회, 『한국근현대사강의』
- 국사편찬위원회, 『신미양요 문서 자료집』
- 유홍준,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2』 (강화도 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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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를 구하기 위한 최선의 선택이었을까요, 아니면 시대의 흐름을 막은 안타까운 결정이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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